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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데이터를 다시 입력하여 최종적인 작품의 토대가 완성되었고[사진 위키피디아] 구메무라(久米村)는 홍무제가 보내준 36가구로 출발한 동네라 하는데.
제주도보다 작은 섬이 북산·중산·남산으로 쪼개져 있었다니 제주도의 삼성혈(三姓穴)이 떠오른다.그 남쪽의 오키나와섬에는 그 사이에 삼산(三山)시대를 거쳐 류구국이 세워졌다.특히 16세기 중엽 일본의 중국 조공이 끊기면서 류구왕국의 황금시대가 펼쳐졌다.
[사진 위키피디아] 류구는 두 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260여 년을 지내게 되었다.타이완을 ‘소(小)류구로 적은 기록이 14세기까지 중국에서 나타난 데서 그 시대 타이완의 존재감이 얼마나 빈약했는지 알아볼 수 있다.
단순하고도 효율적인 디자인의 배들이 일찍부터 만들어져 남양문명의 확산과 광대한 해역의 교역활동에 이용되고 중국의 정크선(junk)을 비롯한 많은 선박 형태의 모델이 되었다.
‘류큐번(藩)을 선포할 때 청나라는 제 앞 가리기에 바빴다.이웃의 작지 않은 나라를 아주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.
17~19세기를 통해 류구는 두 나라 사이를 이어주는 역할로 안정과 번영을 누렸다.청나라에 조공을 바쳤던 외국인을 그린 ‘황청직공도(皇清職貢圖·1769년경)에 등장하는 류구인.
임진왜란 후 중국 조정은 일본을 공식적으로는 외면했지만.일반인은 구메무라 주민을 중국인의 후예로 여겼다.